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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물길의 흐느낌에 ‘징징징’ 칼의 노래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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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05 10:30:00 수정 : 2017-01-05 10: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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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섬 진도, 이순신의 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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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바람, 그보다 더 거친 물결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천둥이 치는지 몸서리치게 울부짖는 바다가 가장 먼저 인사를 하는 울돌목
나라와 백성의 생을 위해 일신의 사를 두려워 않던 호랑이 같은 결기가 이 바다에 살아있다
울돌목은 경사가 심한 산을 타고 내려오는 계곡물처럼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흐른다. 초속 6m가 넘는다. 여느 바다에 비하면 네 배나 빠른 속도다. 물 위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삼켜버리겠다는 듯 곳곳에서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바다를 건넌다. 다리 위를 지나자 차가 순간 흔들린다. 가장 먼저 외지인을 맞는 것은 바람이다. 거센 바람을 이겨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다리를 건넌 뒤에도 바람은 잠잠해지지 않는다. 몸을 똑바로 가누기 힘들 정도의 바람에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바다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더해진다. 고요한 바다가 아니라 몸서리치게 울부짖는 바다가 여행객을 맞는다.
전남 진도는 해남에서 다리를 건너야 닿는 곳이다. 뭍과 섬을 연결하는 진도대교 아래로는 거센 물살이 흐른다. 경사가 심한 산을 타고 내려오는 계곡물처럼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흐른다. 초속 6m가 넘는다. 여느 바다에 비하면 네 배나 빠른 속도다. 물 위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삼켜버리겠다는 듯 곳곳에서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바다 속 곳곳의 암초와 빠른 조류가 만나 생기는 것이다. 
울돌목. 물길이 휘돌아 나가는 바다가 마치 우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려 붙은 이름이다. 한자로는 명량(鳴梁)이다. 진도의 역사는 울돌목과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뿐 아니라 고려시대 삼별초 항쟁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던 이유도 바로 이 울돌목 때문이다. 남해에서 물자를 개경이나 한양까지 가장 빨리 운송할 수 있는 길목이 울돌목이다. 진도를 차지하면 이 길목을 움켜쥘 수 있었다.
전남 진도 녹진관광지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진도대교 아래까지 이어지는 해안 데크를 걸으면 울돌목의 빠른 유속을 체감할 수 있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불을 뿜었다. 133척의 왜적 함대가 명량해협인 울돌목에 들어섰다. 일자진을 형성한 조선 수군 13척은 적을 향해 포를 쏘며 맹렬히 돌진했다. 마침 울돌목 물살 방향이 바뀌었다. 왜적은 남해에서 서해 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타고 쳐들어왔다. 이 해류가 서해에서 남해로 바뀌자 우왕좌왕했다. 암초에 부딪힌 급류는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왜적 함선은 소용돌이에 휩쓸리거나,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부딪혔다. 조선 수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포와 불화살을 퍼부었다. 133척의 왜군 함선 중 31척이 완전 격파됐다. 나머지 함선도 형태만 유지한 채 달아나기에 바빴다.
진도타워의 조형물. 명량대첩의 조선 수군을 활약상을 기념하고 있다.

2017년 정유년 새해로부터 420년전인 1597년 정유년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대첩이다. 이 승리로 남해에서 서해로 이어진 왜적의 보급로는 끊겼고, 이후 정유재란은 조선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임금 선조에게 이 말을 남기고 전투를 치른 울돌목을 보고, 듣고, 느끼려면 녹진관광지로 가면 된다.
전남 진도 녹진관광지 이순신 장군 동상은 국내 최대 규모로 동상부와 기단부 등을 포함해 총 높이가 30m에 달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국내 최대 규모로 동상부와 기단부 등을 포함해 총 높이가 30m에 달한다. 이곳에서 진도대교 아래까지 이어지는 해안 데크가 설치돼 있다. 사리 때인 음력 보름과 그믐에 가장 강한 유속을 확인할 수 있다. 진도대교 아래엔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투명유리로 된 전망대가 있다. 발 아래로는 바닷물이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울돌목을 지나는 바닷물의 유속을 직접 느끼고,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진도대교 건설되기 전 진도의 관문 구실을 했던 나루터 벽파진. 벽파진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왜적과 싸우기 전 16일 동안 머물며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곳이다.

녹진관광지 인근 언덕에 있는 진도타워에서는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울돌목의 모습과 진도 주위의 다도해 풍광을 잘 볼 수 있다. 진도타워에서는 강강술래 터로 이어진 길이 나있고, 그 아래로는 피섬이 떠있다. 명량대첩 당시 죽은 왜적의 피가 스며들어 붉게 보인다 하여 불리게 됐다. 녹진관광지에서 20분 정도 승용차를 타고 가면 벽파진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왜적과 싸우기 전 16일 동안 머물며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곳이다. 
벽파진에 있는 이충무공전첩비는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 있으면서 울돌목을 굽어보고 있다.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는데, 같은 글자라도 모두 다른 형태로 써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1984년 진도대교 건설되기 전 진도의 관문 구실을 했던 나루터다. 포구 뒤편 암산에 오르면 이충무공전첩비가 우뚝 서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m이며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 있으면서 울돌목을 굽어보고 있다.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는데, 같은 글자라도 모두 다른 형태로 써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고려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 행궁터.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물러난 뒤 왕족인 왕온을 새 왕으로 추대한 후 끝까지 몽골에 저항했다.

이곳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고려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 행궁터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당시 고려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진다. 몽골에 굴복한 개경 정부와 끝까지 저항한 진도 정부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물러난다.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울돌목에서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왕족인 왕온을 새 왕으로 추대한 후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다. 특히 진도를 중심으로 부산까지 세력을 확대했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운을 차단했다. 경제적 타격이 커지자 개경 정부는 여몽연합군을 꾸려 삼별초의 진도 정부를 공격했고, 삼별초 잔여세력은 제주도로 옮겨간다.

진도 삼별초의 중심이 바로 용장산성이다. 지금은 행궁터와 석축만 남아 있어 과거의 영화만 확인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석축의 제일 위로 올라가면 계단식 궁궐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산성 옆 전시관에서는 삼별초와 용장산성에 관한 모형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진도 의신면 왕무덤재에 있는 ‘왕온의 묘’. 고려의 새 왕으로 추대됐지만 여몽연합군에 밀려 패퇴하다 몽골군에 의해 죽는다.
또 진도 의신면에는 왕무덤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인근에 ‘왕온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새 왕으로 추대됐지만, 여몽연합군에 밀려 패퇴하던 왕온은 의신면에서 처참하게 죽는다. 당시 왕온을 죽인 인물이 몽골로 귀화한 고려인 홍다구로 전해진다. 또 삼별초를 지휘하던 배중손도 진도에서 죽었는데, 시신조차 수습 못했다. 임회면에 있는 배중손 사당만 그를 기억할 뿐이다. 삼별초의 제주 항쟁마저 얼마 안가 진압되고, 몽골의 100년 지배가 이어지게 된다.

진도=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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