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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문화재] 인권 보호 애쓴 조선시대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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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29 21:29:28 수정 : 2016-06-29 21: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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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화’라는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다. 전옥서(典獄署·죄수를 구금했던 교도소)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이곳을 드나드는 온갖 ‘기인과 잡놈’들에게 배움을 얻어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옛날 감옥은 실제로 어땠을까 싶어질 때가 있다. 1997년에 이런 의문에 답이 될 만한 발굴이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해 경주읍성 내에 자리했던 조선시대 옥사(獄舍·모형 사진) 유적을 발굴했다. 해당 옥사는 19세기 이전에 그려진 ‘경주읍내전도’(慶州邑內全圖)에 등장한다. 그림을 보면 둥근 담장을 둘린 원옥(圓獄) 형태로 내부에 2동의 건물이 섰고, 앞쪽으로 관헌 건물이 존재했다. 둥근 돌담장 내부에서는 동서 2동의 건물터와 감시초소, 좁은 문, 관헌건물터가 나왔다. 담장 바깥으로는 너비 4∼5m에 이르는 수구가 있었다. 쉽사리 탈옥을 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든 것이다.

문헌과의 비교로 조선시대 감옥의 인권지향적(?)인 면모가 드러나기도 했다. 세종대 배포된 경주옥사의 표준설계도(1426) ‘안옥도’를 보면 남녀 감옥을 구분했고, 여름옥과 겨울옥을 두어 수형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발굴 결과, 동쪽 건물터가 크고 서쪽이 작아 음양배치에 따른 남녀 옥의 구분이 가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름, 겨울을 구분할 수 있는 건물구조가 확인되지 않아 여름에는 흙벽을 허물어 시원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서양에서 남녀 감옥의 분리는 1595년 네덜란드에서 처음 실시되었다고 한다. 경주옥사에 대한 문헌조사,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하면 조선이 서양보다 170년 정도 앞서갔다고 판단할 수 있다.

경주옥사는 19세기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은 곳임도 기억해두자.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허인백 등 3명이 경주에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다고 전한다. 이들은 모두 2014년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시복됐다.

이은석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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